박순자와 오대양의 창립
사건의 발단은 박순자가 오대양이라는 사이비 종교단체와 기업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박순자는 1974년 횡격막에 병이 생겨 고통받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병이 회복되는 일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물론 사이비 종교의 특성상 거짓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박순자는 신 덕분에 병이 나았다고 믿었는지 신학교를 다니다가 여호와의 증인에 입문했고, 다시 기독교복음침례회 소위 구원파에 출석을 하기도 했다.
박순자는 구원파에서 자신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이탈하여 1984년 5월, 대전에서 시한부 종말론을 따르는 사이비 종교 겸 회사를 직접 만들었는데 바로 '오대양'이었다. 오대양이라는 교명은 박순자가 "나는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으로 앞으로 전 세계를 주관하게 될 것이다."라고 공언한 데서 나왔다고 한다.
오대양 교단은 유치원과 양로원과 고아원 건물을 사들이거나 임대해 사회사업을 했다. 겉으로는 시설을 당시로선 최신식으로 꾸며 고아들을 잘 키우는 것처럼 위장했지만, 실제 속내는 신도들의 자녀를 세뇌하여 아이들에게 '부모는 없고 너희는 고아이며 박순자만이 진짜 어머니'라고 유도했다. 심지어 아이들에게 부모를 찾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소리도 공공연히 했다.
더불어 신도들과 그 자녀들을 모아 집단으로 생활하게 했고 그 과정에서 신도들을 사람답지 않게 통제했다. 부부들에게는 각방을 쓰게 하고 금욕생활을 강요하며 외출도 금지했다. 2주에 한 번씩, 그것도 많은 사람들끼리 단체로 외출하는 것만 허용했고, 외출 후에는 반드시 외출 시에 같이 나간 상대방이 밖에서 한 모든 행적을 일일히 보고하도록 했다.
그리고 매월 한 번씩 '반성의 시간'이란 것을 했는데, 이때 신도들은 한 달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실토하고, 규율을 어겼음이 드러나면 벌이라는 명목으로 가차 없이 집단구타를 당했다. 일례로 딸이 어머니가 잘못한 것을 처벌한다면서 어머니를 두들겨 패고 어머니는 이것을 감사해 하는 황당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박순자의 사업실패와 사채[편집]
교주 박순자는 1984년에 공예품 제조회사 '오대양'을 만든 뒤 수입품 판매장을 만들면서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대전과 용인 등의 공장을 사들이며 사업을 확장했다. 1986년 4월, 일본의 모 전자 부품 생산업체와 합작해 당시로선 대단한 거액인 7억 원을 투자해 전자제품을 만들려고 했으나 사기를[3] 당했고 사업은 실패했다.
이 손실을 매꾸기 위해 박순자는 신도들에게 '사채를 많이 끌어오라.'고 명하고, 신도들은 자신의 일가친척들에게도 돈을 빌려서 박순자에게 바쳤다. 그리하여 박순자가 신도들을 굴려 끌어모은 사채는 무려 170억 원에 달했다. 갚지는 않고 사채만 끌어 쓰니 당연히 채무자들에게 독촉과 사채이자가 쌓여갔다.
87년 8월 16일, 박순자에게 7억 원을 빌려준 이상배라는 사람이 빌려준 돈을 갚으라 독촉하려고 부인과 함께 오대양 공장을 찾았다가 신도들에게 집단 구타당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경찰에 오대양을 고소했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이들의 만행에 더 이상 참다 못한 다른 채권자들도 박순자와 오대양을 고소했고, 경찰은 사기혐의로 박순자를 조사했고, 사회에서 주목받게 되었다.
엄청난 사채 이자를 더는 감당 못할 지경에 이르고 경찰과 언론의 압박까지 계속되자 박순자는 특별히 사채를 가장 많이 끌어모은 열성 신도와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31명과 함께 오대양 용인 공장의 식당 천장에 4일간 숨었다.
집단 자살
1987년 8월 29일, 오대양 직원 김 모 씨는 경기도 용인의 공장에 왔다가 내려앉은 숙소의 천장을 보고 이상히 여겨 식당 쪽으로 갔는데 식당 천장에서 죽어 있는 박순자를 포함한 32명을 발견하고 마침 가족을 찾으러 공장에 온 박순자의 남편에게 알렸다. 박순자의 남편이 경찰에 오후 4시 무렵에 신고해 집단변사가 세상에 알려졌다.
사건 현장에서는 사망자들이 썼다고 보이는 메모들이 발견되었는데 "사장이 독약과 물을 가지러 갔다."라거나 "xx도 지금 매우 고통을 받고 있다.", "xx가 꿈을 꿨는데 그곳이 지옥이라고 하더라.", "남자는 다 잡혀가고 여자들은 다 헤어지고..." 하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사망일자는 발견 당일(8월 29일)로 보였다.#
메모 내용 때문에 처음에는 사람들이 집단으로 음독하고 죽은 게 아닌가 추측했지만, 경찰의 부검 결과 독극물은 나오지 않았고 대신 하이드라민이라는 신경안정제 성분이 발견되었다. 실제 사인은 교살로 판명되었으므로, 경찰은 사망자들이 멀미약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로 보았다.
가장 먼저 박순자가 공장장 이경수에게 자신을 교살하게 한 뒤, 뒤이어 이경수를 비롯한 남자들이 여자들을 교살시킨 뒤, 박순자의 두 아들들이 철골 서까래에 줄을 매고 자살하고, 마지막으로 이경수가 목을 메어 자살했다고 경찰은 결론 내렸다.
이경수의 시신이 무릎을 구부린 채 매달린 탓에 이것을 타살의 증거로 주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발받침이 없거나 목을 매단 곳이 낮을 때 무릎을 꿇는 등으로 자살하는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믿기지는 않겠지만) 엎드린 자세로 목매달아 죽은 사례도 있다.
사망자들의 사망 정황은 드러났다지만, 이 사람들이 집단으로 왜 자살했는지는 명확히 드러난 바는 없었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경찰 당국은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보이는 오대양 직원 11명을 공개수배했지만, 이 사람들은 그때는 잡히지 않았다.
사건의 전모가 일부나마 드러난 것은 1991년 7월, 수배 중이던 오대양 직원 중 6명이 자수하면서부터였다. 자수한 사람들의 진술로 사건의 열쇠를 쥔 것으로 주목받았던 오대양 총무 노순호, 기숙사 가정부 황숙자, 육아원 보모 조재선 등이 이미 사건 발생 전에 반성의 시간에서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오대양 직원들에게 살해된 뒤 암매장을 당했다고 밝혀졌다.
이 사람들의 자수로 사건이 대전지방검찰청에서 재조사되었고, 검찰 수사 결과 1987년의 수사와 동일하게 32명의 집단 자살 사건으로 결론이 났다.
오대양 사건, 의혹과 밝혀진 내용
당시 세간에는 죽은 사람들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자살을 강요받았고, 심지어 타인의 손으로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손석희 당시 앵커는 임의대로 집단타살이라고 방송했었다.# 또한, 국회의원 박찬종이 1991년 7월 19일 기자회견을 이용해 박순자가 한때 몸담았던 구원파와 구원파 신도가 경영하던 모 회사가 사건의 배후라는 의혹을 제기하여 일파만파 번지기도 했다.
구원파가 사건에 개입됐으리라 의심한 사람들은 박순자가 실제로는 구원파를 이탈하지 않았고, 모종의 이유 때문에 구원파를 이탈한 척하며 오대양을 차렸다고 주장했다. 박순자는 구원파의 대전 지역 자금조달 책임자였고, 오대양은 외부의 돈을 끌어모으려는 구원파의 위장 계열사로 구원파 신도가 경영하던 모 회사의 자금을 마련하고자 박순자가 오대양을 차리고 신도들에게 거액의 사채를 끌어오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오대양이 세간에서 주목받고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구원파나 모 회사가 박순자와 다른 31명을 살해했다는 것이 당시 세간에 떠던 타살 의혹의 골자였다. 당시 언론에 제기되었던 내용인데, 실제로 오대양과 구원파 계열 사업체 간 자금거래가 있었다는 내역이 일부 확인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순자가 오대양 설립 이전에 물품 대금을 구원파 교인에게 사업관계로 송금한 사실이 있으나 이는 정상적인 거래일 뿐 오대양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점이 밝혀졌고, 거액의 오대양 사채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갔냐는 관심에 대해 수사 결과 어디론가 유입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오대양이 고율의 사채 이자를 갚는 데 쓰인 것으로 추정됐다.
위의 의혹은 송금 관련 오해와 오대양에서 구원파 관련 회사에 한 차례 정도 인형을 구매한 적이 있는 점, 박순자가 한 때 구원파에 잠시 출석한 점이 있었던 점 등이 지나치게 확대 해석된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오대양사건은 1987년과 1988년, 그리고 1991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세 차례나 재조사를 받은 결과 외부 세력과 관련없는 집단자살로 동일하게 결론이 났고 구원파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당시 언론들에 의해 유병언 전 세모 회장 역시 오대양 사건의 배후로 그려지고, 그로 인해 구속 및 형을 살았다는 보도들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수사 결과 오대양 사건 관련해서는 전부 무혐의였으며, 그와 전혀 다른 별건 수사인 과거의 이미 불기소된 상습사기죄로 4년 형을 선고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대양 사건의 배후처럼 지목되어 오기도 했다.
(상습사기죄는 돈을 빌려주고 못 받았다는 내용으로 이에 대해서도 유병언 전 회장은 돈을 받은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고 살아있는 동안 기회가 될 때 마다 억울함을 호소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두고 당시 유병언 전 회장과 오대양 간의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뭐라도 체포할 혐의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별건 수사인 과거의 불기소된 사건을 억지로 들춰내어 혐의를 씌우고 형을 살게 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기도 한다.)
후일에는 이 사건을 두고 월간조선,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시사정경 등의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은 언론의 지나친 보도 경쟁과 일부 정치인의 정치적 이용 등이 어우러진 사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구원파는 2014년 당시, 금수원을 진입하려던 검찰에게 오대양 문제와의 연관없음을 정확히 밝히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를 보면, 과거의 이 누명이 그때까지 그들에게 꽤나 상처고 억울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이로 인해 인천지검은 실제 공문을 통해 오대양 사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과거 검찰에서 철저하게 수사했고, 해당 사건이 구원파와 관계 없다고 다시 한번 밝혀주기도 했다.
또한, 일부에서는 죽은 사람들이 모처에서 살해당하고서 공장 식당의 천장으로 옮겨졌다고 주장했지만,[9] 사건현장을 감식했던 경관은 현장의 상황상 다른 곳에서 살해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일축했다. # 또한 사망자들 중 여자들을 부검하니 정액 양성 반응이 나왔기에 죽기 전에 강간당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당시 부검의는 국과수의 정액 양성 반응은 오류라고 반박했다.
검찰도 1987년 경찰이 결론 내린 대로 32명 중 박순자를 포함한 29명은 목이 졸려 살해당했고, 박순자의 두 아들과 공장장 이경수는 목을 매 죽었다고 판단했다. 당시에 사건을 수사한 검사였던 박영수 변호사는 2014년 인터뷰에서 "현장을 봤다면 타살 의혹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라며 타살설을 강하게 부정한 바 있고, “국회에서 5공 비리 청문회 때 재조사가 있었죠. 저도 법무부에 6개월간 비공식적으로 파견돼서 그 조사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국회 조사에서도 오대양 사건에 유병언씨가 연루됐다거나 5공 인사들이 개입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혹의 출발점이 되는 타살에 대한 새로운 증거도 없었고요. 91년 조사는 그해 7월 오대양 관계자 6명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시작된 것인데 그 조사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91년 당시 유병언씨를 검찰이 구속했지만 유씨의 구속은 오대양 사건과 관련해서가 아니라 상습사기 혐의였습니다.” 라고 인터뷰한 내용도 있다.
그리고 오대양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최후의 목격자 할머니가 실종되었다는 보도들이 있었고 이로 인해 굉장히 많은 추측들이 있었으나, 이후에 할머니는 딸이 모시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해프닝도 있었다.